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쇼펜하우어]
내 성격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심하고 공감을 못해서 였다. 나는 외향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성격이 되고 싶었다.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묻기도 했고,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자원해서 발표했다. 소심한 성격은 자주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연습을 하며 고쳐졌지만, 공감 못하는 성격은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았다. 감정적인 공감보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더 고민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적인 공감을 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적인 공감은 어려웠다. 나는 상황이 이해가 되어야 공감이 됐고, ‘힘들겠다.’보다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고민이 항상 앞섰다. 내 성격에 어디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하고 고민하던 중에는 MBTI를 알게 됐을 때는 신기했다. 아니 고마웠다. 이때부터 고치려는 노력보다 이해하려 노력했다. 나는 MBTI를 기준으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 책은 그런 노력 중에 만났다. TV, 인터넷에 떠도는 쇼펜하우어의 말들이 특별하기 보다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 느껴졌고, 더 자세한 생각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몇가지 내용 말고는 매우유사했다. 대부분 동의하고, 이해됐지만 우정에 대한 견해는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이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쇼펜하우어는 ‘나’로 살라고 이야기 하지만, 우정에 있어서는 예외를 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정을 가진자는 두개의 한 영혼이 쓰러지더라도 곁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둘이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불행을 혼자 감당하려는 것보다 무의미한 만용은 없다. 당긴 곁에서 당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당신의 잘못에 대해 함께 용서를 구하려는 친구를 가져라.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 또한, ‘나’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2개의 기울어진 나무는 서로를 지지할 수 있지만, 그 무게가 균형이 맞지 않으면 결국엔 무너질 것 같았다. 쇼펜하우어는 우정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로서 살아야 한다는 말과 모순 같다. '사람들이 원하는'이라는 말에 친구는 포함되지 않는걸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내가 기댄가는 것은 ‘나’를 잃어 버리는 것 같아 여전히 두렵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 생각도 많았다. 그 중에 교육에 대한 생각은 극단적이지만 비슷했다.
교육이라는 외부강압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거의 순간 마다 다가오는 위험이다.
교육은 교육을 듣는 사람은 교육을 하는 사람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기 마련인데, 교육을 하는 사람이 잘 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경우에는 큰 위험이 뒤따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교육을 하는 모두가 이런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교육을 듣는 사람은 이런 위험은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강사를 너무 믿지마세요.’라고 이야기 한다.
사색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욕망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자만이 고통없는 죽음을 만끽할 자격이 있다.
‘행복한 인생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보면 죽기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 아닐까 싶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누고,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독서를 하면서 생각에 대한 정리는 했지만, 깊은 사색은 하지 않았다. 사색은 어쩌면 ‘지도를 보는 행위’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몰라서 사색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위안을 얻기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변화했다기 보단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얻고, 위안을 얻는 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틀리지는 않고, 하나의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해주는 듯 했다.